우연히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 케이블에서 명작스캔들 재방송을 봤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소개하며 진행자와 패널들이 시녀들에서 벨라스케스는 과연 누구를 그리고 있을까를 주제로 열띤 토론을 하는 것을 보고 벨라스케스에게 궁금증이 생겼다.

 

거울 놀이의 폐해(?)

 

이 그림에 10명의 모델(펠리페 4세 부부까지 합하면 12)들이 각각의 행동과 시선으로 지금까지 많은 논란과 이야기가 탄생한다. 에이크의 아르노피니 씨의 초상화에서도 거울이 등장하지만, 그 거울은 감상자가 보는 평면적인 것 외에 가상적인 공간을 느낄 수 있다.

에이크의 그림은 공간과 더불어 관음증을 느끼지만 시녀들은 그 차원을 넘어 감상자들이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미래는 과거를 재구성하여 과거를 판단한다. 그러나 시녀들은 에이크의 그림과 달리 상황이나 의도가 명확하지 않기에 시녀들을 바라보는 감상자들이 그 당시를 재구성하는 놀이에 빠져든다.

벨라스케스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피카소, 고야, 마네, 달리 등 후세의 화가나 푸코 등 많은 철학자 그리고 소설가들이 그가 만든 프레임에 즐거이 갇혀 거울놀이를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는 폐해를 만듦으로써 시녀들은 점점 더 미궁으로 들어간다.

 

나르시시즘

 

벨라스케스가 그린 그림 중에 거울을 보는 비너스에도 거울이 등장한다. 이 그림은 벨라스케스가 시녀들보다 5년 정도 앞에 그린 것으로 내가 좋아하는 그림 중에 하난데 그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아프로디테의 모습과 닮았기도 하지만 구도가 아주 마음에 든다. 아프로디테의 매력적인 뒤태는 굳이 앞모습을 보지 않아도 그 아름다움이 상상되어 더욱 섹시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핵심은 비너스는 다른 사물이 아닌 오직 거울에 비친 자신만 주시하는 데 있다. 마치 자신의 모습에 심취한 나르키소스가 연상되기도 하는데 어느 땐 그런 그녀의 무심함이나 시크함의 행위에 상처를 받기도 한다. 거울에 비친 비너스의 눈을 보면 거울 뒤편을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녀만 보고 있기에 어찌 저리 무심한지 예쁜 것들은 다 저럴 거라며 원망이 살짝 고개를 든다. 아마도 나 스스로 예쁜 축에 끼지 않음의 진실에 대한 회피나 변명일 수도 있다.

 

원래 시녀들엔 벨라스케스가 아니라 카를로스 왕자가 그려졌었다고 한다. 그림의 방도 사실 카를로스 왕자의 방이다. 그러나 왕자가 3년 후에 죽자 벨라스케스는 자신을 그려 넣었다. 그 그림을 그리고 3년 후엔 작위까지 받자 벨라스케스의 가슴에 십자 모양까지 다시 그려 넣었다고 하니 이 그림에 대단히 애착이 있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왜 벨라스케스는 본인을 그려 넣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벨라스케스의 자기애가 아닐까 싶다. 벨라스케스는 언뜻 마르가리타 공주가 주인공으로 착각을 하게 의도적으로 자신을 왼편에 그렸다고 본다. 하지만 뒤만 보이는 캔버스 때문에 그리고 그들의 제각각인 응시하는 초점(?) 때문에 감상자는 벨라스케스가 주인공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트릭인 것이다. 뒤에 펠리페 4세 부부가 있는 거울도 거울이 아닌 액자일 경우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벨라스케스는 펠리페 4세의 가족들이라는 처음 제목처럼 카를로스 왕자와 마르가리타 공주가 주인공으로 그렸을 공산이 크다. 그리고 그 그림엔 캔버스 뒤도 없었을 것이다. 오로지 벨라스케스의 시점으로 보이는 그림을 그렸는데 후에 캔버스와 자신을 넣음으로써 이 그림에 환상이 생겼다. 그러면서 감상자들에게 내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그리고 있게? 하고 추론을 부추기는 형상이 되어 버렸기에 아직도 수많은 사람에게 끝없이 화자가 되고 우리는 이 그림이 아닌 그가 지금 그리고 있는 즉, 보이지 않는 캔버스 안의 실재와 벨라스케스라는 인물에 집중하게 한다.

 

벨라스케스는 실제로 성공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고 한다. 또한, 그 당시 펠리페 4세의 엄청난 총애를 받았기에 나르시시즘이 내재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감히 왕족과 자신을 나란히 그것도 보이지 않는 거울이라는 트릭을 쓰는 수고를 하면서까지 그렸을까 말이다.

 

 

뫼비우스의 띠

 

난 벨라스케스가 시녀들을 그렸을 그 당시엔 모델들 앞에 큰 거울이 없었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그래야 이 문제의 답이 완결되어 끝난다. 만약, 큰 거울이 존재했었다면 답을 내지 못하고 원제로 계속 환원이 되는 문제에 봉착하기 때문이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거울과 뫼비우스의 띠는 결국 같은 것을 마주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거울은 사물이 비치지는 그 모습 그대로를, 뫼비우스 띠는 거기에 무엇을 올리든지 보내는 자에게 같은 것이 되돌아온다. 그렇다면 난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올릴 것인가? 이것은 내 작품의 주제에 대한 과제이기도 하며 작가가 지녀야 할 자세다.

나의 신념과 가치관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는 세계관과 이상은 무엇인가?

피하지 말고 나를 보고 나를 탐구하자! 거울과 뫼비우스의 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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